사도행전 7:54~8:5
5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57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1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2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5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늘었습니다. 그래서 그 축복 때문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도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자신들은 말씀과 기도에 집중하고 봉사와 섬김의 역할을 맡을 새로운 리더십을 세워 역할을 분담했습니다. 다음 단계로 나아간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더 큰 축복을 받아서 더 많은 사람이 구원받고, 심지어 제사장들 중에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순교하고, 예루살렘교회가 풍비박산이 나는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이 비극적인 문제는 무엇 때문에 일어났습니까? 문제 자체가 아니라 문제의 이면을 보는 눈이 생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 때문입니다. 교회가 더 성장했기 때문에 반대자들이 더 큰 위기감을 갖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스데반 집사님에게 지혜와 담대함과 성령님의 역사를 부어 주셨기 때문에, 그것은 자신의 순교를 넘어 예루살렘 교회 전체의 박해로, 예루살렘 교회 전체가 무너지는 가슴 아픈 재앙으로 전개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축복일까요? 저주일까요?
교회에는 문제가 있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의 출발점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문제에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따라 그 문제가 다음 단계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되어, 더 큰 축복의 통로가 되기도 하고, 절망하고 좌절하고 무너지는, 받은 축복까지도 빼앗기게 되는 저주의 통로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신약교회는 더 큰 축복의 통로와 기회로 삼았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 순교하는 중에도 예수님처럼 자신을 돌로 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교회를 박해하던 사울에게 큰 충격이 되었고, 사도바울이라는 위대한 복음전도자가 탄생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은 박해를 피해서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들은 흩어져 도망치는 가운데 온유와 사마리아까지 이러러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통로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박해를 받아서 모든 것을 다 잃고 도망치는 사람들이 전한 복음은 어떤 복음이었을까요? 예수 믿으면 부자되요!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해요! 예수 믿으면 성공해요! 그런 복음을 전했을까요?
기독교 복음은 만사형통의 복음이 아닙니다. 기독교 복음은 땅의 복을 전하는 복음이 아닙니다. 기독교 복음은 부활의 복음입니다. 땅만 바라보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게 하는 복음입니다. 그래서 스데반 집사님은 자신을 돌로 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며 순교할 수 있었고, 박해를 피해 흩어져 도망가던 예루살렘교회 성도들도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짜 기독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