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6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
7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
8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 중에 있는 선지자들에게와 점쟁이에게 미혹되지 말며 너희가 꾼 꿈도 곧이 듣고 믿지 말라
9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어도 그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함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0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12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13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에게 좌절이나 절망으로 우울한 삶이나 혹은 독립을 위한 투쟁의 삶이 아니라, 그 땅의 평안을 기도하며 거기에 정착해서 생존하여, 70년 후에 허락하실 예루살렘으로의 귀환을 준비하라고 명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다음 세대로 그리고 그 다음 세대로 믿음을 전수하라는 명령입니다. 비겁자로 오해받기를 감수하면서, 자손들이 하나님의 때가 되었을 때 그 땅에 이루어 놓은 것들을 내려놓고 예루살렘으로 기꺼이 귀환할 수 있도록,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신앙의 도전이었을 것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의 상황 속에 들어가 보면,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자기 나름대로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해할 수 없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것에 기꺼이 순종하는 삶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옳은 것을 추구하는 것이 신앙이라면, 전쟁을 앞둔 상황에서 어떻게 항복하라고 외칠 수 있으며, 또 구차하게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항복하는 삶을 신앙의 이름으로 선택할 수 있으며, 그리고 후에는 원수의 나라의 평안을 빌며 그 땅에 정착하는 비겁해 보이기 짝이 없는 생존의 길을 선택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의 말씀 가운데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6:33~34)” 명하셨습니다. 아직 내 것이라 할 수 없는 내일에 대한 염려 때문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오늘”을 소진하지 말고, 현재를 살아라. “Here and Now” 지금 바로 여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상황 속에서 오늘을 살아라 ~ 명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바로 그 것이 “먼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한다는 것은 옳고 바른 일을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은 내 생각에 옳아 보이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원칙을 정해 놓고 원칙을 따라 사는 삶도 아닙니다. Here and Now,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오늘, 지금 여기에서 주님의 음성을 경청하며,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하며 사는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