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때로는 우리를 곤란하게도 하고, 때로는 흥분하게도 만드는, 묘한 존재입니다. 시간은 소유할 수도 없습니다. 지금을 잡았는가 하면 그 순간 그것은 흘러간 과거가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 앞에서는 늘 겸손해집니다. 살다보면 끝이라고 생각되는 시간이 우리에게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낙심하고 좌절하지요.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이런 시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반응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오늘의 본문은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나는 장면의 시작입니다. 이 말씀에서 주님이 그 식구들을 사랑하셨다는 말은 너무나 중요한 전제입니다 (5절).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입니다. 그 분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기에 우리 삶의 모든 것이 협력해서 선을 이루게 된다는 것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나사로와 그 가족을 깊이 사랑하셨던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의적으로 이틀을 더 지체합니다. 그리고는 유대지방으로 돌아가셨고, 이미 죽어서 나흘이 된 나사로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죽음은 사람에게는 끝이 나는 순간입니다. 하지만 그 순간조차도 주님께는 끝이 아니라 과정일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과정이요. 시작이고 끝이신 하나님을 두고 요한 계시록은 알파와 오메가이신 분이라고 부릅니다. 끝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제 최종적인 목적이 다 이루어졌거나 더 이상 그것이 과정이 아니라 마지막이라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 끝에 계십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향해 흘러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얼마나 좋은 일을 주시려고!”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겁니다. 우리가 끝이라고 생각하는 그 어떤 순간도 끝이 될 수 없는 겁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좌절과 슬픔에,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을 만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이런 상황에 닥쳤을 때 주님은 “나사로야, 나오너라!” 부르십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____아, 나오너라. 너 스스로 만들어둔 감정의, 관계의, 집착의, 미움의, 자기연민의, 걱정의, 두려움의 무덤에서 일어나 생명의 대지로 발걸음을 디뎌라!” 이런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런 주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 되기에 우리가 생각하는 끝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가장 깊이 경험하는 순간이 될 수 있습니다. 오빠가 죽은지 나흘이 되어 이제 끝이라고 여기는 마르다에게 주님은 “나는 부활이고 생명이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질문합니다. 그리고 “내가 믿습니다!”라는 그녀의 고백으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은 일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믿습니다! 비록 지금 그 일하심이 보이지 않더라도, 약속을 지키시는 주님을 믿습니다. 나를 사랑하시기에 내 삶을 회복시키기를 기뻐하시는 주님을 믿습니다!” 우리의 이 고백으로부터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생각하는 끝은 결코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