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D1uD9XRlP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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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3:16~18>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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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진노와 사랑이 만나는 십자가>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게 그 분의 임무다.”
이 말을 들으면 어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용서는 하나님께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여러번 전해줍니다 (출애굽기 19:24).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그 의를 양보하지 않으심에도 또한 용서하시는 분이라는 이 두 성품이 성경에는 팽팽하게 대조됩니다 (출애굽기 34:6-7). 하나님은 어느 쪽의 하나님이실까요? 그 분은 사실 사랑의 하나님임과 동시에 진노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 양면이 어떻게 모순되지 않고 서로 협력해 세상을 구원하는지 우리는 십자가에서 볼 수 있습니다.
너무나 유명한 요한복음 3:16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기분이 좋아지는 구절입니다. 하지만 18절에만 가도 심판을 이야기합니다. 같은 장 36절은 진노하시는 분임을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어떤 때는 사랑하시다가 어떤 때는 진노하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처럼 ‘상처 입은 자존심’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하시기 때문에 진노하십니다.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만이 아니시기에 우리는 응석받이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진노의 하나님만이 아니시기에 우리는 학대받은 아이처럼 살아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진노, 이 두 가지가 가장 명확하게 보여지는 상징적인 자리가 십자가입니다.
세상의 많은 종교는 복종을 요구하거나 서슴없이 사람을 멸해버리는 진노 위주의 신은 많지만 절대자가 인간을 사랑하는 인격적인 신은 기독교 고유의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개념은 대단히 희한하고 이상했지만 이 사실이 세상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무분별한 행동을 하는 것을 견딜 수 없듯, 하나님은 사랑하시기에 진노하시는 분입니다. 분노는 사랑의 반대가 아닙니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고, 미움의 극치는 무관심이지요. 죄와 악을 대적하시는 하나님이 죄를 지은 사람들 때문에 눈물을 흘리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는 주님이 되기 위해서는 사랑과 공의, 이 두 가지가 모두 건재해야 합니다. 어느 것도 다른 쪽에 양보할 수 없는 이 둘은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함께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런 사랑처럼 크고 높고 치열하고 희생적인 사랑이 없었습니다. 동시에 율법이 이토록 순수하고 냉혹했던 적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온전히 받아내심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진노는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각자 영화롭게 완성될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재판장과 아버지가 만났습니다. 율법은 사랑과 샘의 물줄기가 되었고, 사랑은 율법을 충족시켰습니다.
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여러분의 삶에 가득 부어지기를 소망합니다. 심야기도회를 지나면서 주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해 주셨기에, 나도 사랑과 용서의 자리로 걸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