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는 자신의 복음서를 예수님의 긴 족보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런데, 이 족보에는 다섯 명의 여인이 등장한다. 첫 번째 등장하는 여인은 다말이다. 그녀는 자신의 시아버지인 유다와의 사이에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다. 두 번째 등장하는 여인은 룻이다. 룻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개라고 여겼던 이방인, 모압 족속이었다. 세 번째 등장하는 여인은 라합이다. 라합은 이방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기생이었다. 이스라엘의 영광이요 자랑인 다윗은 자신의 아내에게서가 아니라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화려한 혈통을 통해서, 결혼하기 전에 임신한 마리아를 통해서 이 땅에 오셨다.
마태는 마태복음 10장 2절에서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소개하면서, 굳이 자신을 “세리” 마태라고 밝힌다.
시아버지와의 사이에서 자녀를 낳은 것이 자랑스럽지 못한 것처럼, 모압여인인 것이 자랑스럽지 못했던 것처럼, 기생이었던 것이 자랑스럽지 못한 것처럼, 내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서 자녀를 낳은 것이 자랑스럽지 못한 것처럼 “세리”라는 직업은 결코 자랑스럽지 못한 것이었다. 오히려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도 훨씬 더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그의 과거였다. 그는 돈 때문에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요, 로마에 빌붙어 사는 기회주의자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부끄러운 것들을 굳이 들추어낸다. 들추어 낼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랑한다. 왜냐하면 바로 여기에 예수님의 소원, 아버지의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다. 예수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제사(예배) 보다도 번제(헌금) 보다도 긍휼(사랑, 용서와 용납)을 보기 원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 있는 “세리” 마태를 제자로 불러 주셨다. 얼굴에 철판을 깔고 수치스러운 죄의 자리에 앉아 있는 마태를 있는 모습 그대로 당신의 제자로 불러 주셨다. 마태와 같은 죄인이 예수님의 열두 사도중의 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면, “나 같은 죄인”이야 용서 받고 구원 받는 것이 무슨 큰 대수가 되겠는가? 마태와 같은 사람이 예수님께 쓰임을 받았다면, 나 역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능히 쓰임 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
마태가 잔치를 베풀고 예수님과 자신의 친구들을 한 식탁에 초대했던 것처럼, 나도 잔치를 베풀고 예수님과 나의 친구들을 한 식탁에 초대하는 정도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내 인생은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께 내어드리자. 우리 집을 그리고, 나의 관계들을 주님을 위해서 내어 드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