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할지니라.(18:22)”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18:35)”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늘 암송하는 주기도문(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을 생각나게 한다. 주기도문에는 우리가 그냥 고백하기에 힘든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6:12)”
이 고백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지 않고 있다면 결코 올려 드릴 수 없는 기도이다. 주기도문은 결코 가볍게 주문 외듯이 할 수 있는 기도가 아니다.
더군다나 예수님께서는 이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시고 난 뒤에 이어서 다음과 같이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6:14-15)”
나 자신의 용서가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에 달려 있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이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우리가 이 말씀을 늘 구원과 연관 지어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용서치 못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 나 자신의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이 세상에 구원을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게다가 사람마다 다른 크기와 깊이의 아픔과 상처를 경험하는데 상상할 수 없는 상처와 고통을 경험하신 분들께는 얼마나 부당한 일이 되겠는가?
그리고 용서를 감정적인 차원으로 생각하는 것도 여기에 한 몫을 하게 된다. 그러나 용서하라는 말씀은 결코 좋아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용서한다고 해서 모든 것을 잊어버려야 하는 것도 아니다. 때로 우리는 과거의 아픔을 생생하게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용서는 무조건 덮어 주는 것이 아니다.
용서의 반대는 무엇일까? 그것은 복수심이다. 그러므로 용서한다는 것은 나에게 힘이 있어도 나에게 기회가 와도 내가 직접 복수하지 않기로 하나님 앞에서 결심하는 것이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가장 선한 판단을 하실 것을 믿고 하나님께 나의 감정과 나의 상황을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훈련을 받아 가는 것이다.
용서하라는 명령은 나를 위한 명령이다. 나의 행복을 위한 명령이다. 용서하자. 원수가 내 인생을 지배하도록 하지 말자. 복수심으로 소중한 내 인생을 소진시키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