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기의 타락한 시기에 유대는 바벨론에게 멸망당할 위험을 안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이 살았습니다. 이 때 하나님이 선지자들에게 주신 메시지는 심판이었습니다. 그런 삶을 살면서 결코 평안을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메시지는 당시 예루살렘에 살던 백성들의 마음을 심히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래, 당신이 하나님께 받은 메시지를 알겠소. 그런데 우리는 지금 그것을 듣고 싶지 않소. 우리가 듣고 싶어하는 말은 우리가 잘 될 것이라는 말이고 어떤 나쁜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오. 이런 말을 하시오. 알겠소?”라고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듣고 싶은 말을 하라는 요구입니다. 이런 죄악된 태도의 뿌리가 죄성입니다.
백성들의 이런 요구는 미래의 불확실성으로 인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이 두려움이 마음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데 그것을 짚으니 힘들다는 겁니다.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내 두려움을 제거하고 마음을 편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이 원하는 것은 금이 가있는 벽이나 담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회칠을 해서 그것이 멀쩡해보이게 해달라는 겁니다. 그렇지만 문제가 있으면 그것을 직면할 수 있고, 이것이 얼마나 믿음을 가진 나를 힘들게 하는지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현실을 외면하게 만드는 힘이 아니라, 믿음은 현실을 직면할 수 있게 만드는 힘입니다. 금간 벽에 회칠을 하는 것은 허망한 것을 믿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이런 요구에 많은 ‘소위’ 선지자들이 영합합니다. 그리고 그 댓가로 인기와 성공을 얻었습니다. 금이가고 무너지려고 하는 틈에 회칠을 해서 보이지 않게 하고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합니다. 이같은 거짓 위안과 거짓 안전에 기초를 두고 마음 속의 불안과 염려를 속이면서 잘될거라고 서로 격려하는 거짓 연합 안에서 우리는 결국 영적 파산의 길로 걸어가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의 복음’은 사라집니다. 다만 인간이 듣고 싶어하는 ‘인간의 복음’만 존재합니다. 그렇지만 회칠을 한다고 벽에 가 있는 금이 회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고치기 위해서 하나님은 때로 벽을 무너뜨리고 다시 세우기도 하십니다. 그 과정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렇게 살기 위해 저는 세 가지를 제안합니다.
1. 문제를 모면하거나 덮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2.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아멘으로 받으십시오.
3. 회개하십시오. 그래서 몸의 욕심이 여러분의 삶의 동력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이 과정에서 보여주고 싶은 것만을 보여주고, 만나고 싶은 사람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목장에서 우리의 깊은 마음이 나누어지고 그것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일이 일상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