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잔칫집보다 상갓집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내면에 축적된 슬픔과 외로움을 어떻게 표출해야 하는지조차 알지 못해, 의미 없는 웃음이라도 지으며 살아가는 그런 상갓집 말입니다. 세상을 어떤 모습으로 바라보건, 성경이 바라보는 세상은 어둡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인간은 자기중심적인 이기적 존재이고, 하나님을 향해서는 반항하는 죄인입니다. 행복을 원하지만 스스로 행복에 이르지 못하고, 기쁨을 원하지만, 그들의 현실을 지배하는 것은 허무와 슬픔 뿐입니다.
이런 배경 하에서 오늘의 본문을 보면 우리에게 더욱 유익하게 다가옵니다. 예수님은 자기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던 가나에서 벌어진 친척의 혼인잔치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이 상황을 감지한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슬쩍 그 사실을 알립니다. 그랬더니 졌다는 듯이 예수님은 어마어마한 양의 더 좋은 포도주를 만들어서 잔치자리에 내놓으십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잔칫집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여줍니다. 잠시 만족을 주는 기쁨은 존재하지만 이내 떨어져버리는 그런 잔칫집 말입니다. 그러므로 포도주는 기쁨을 상징합니다. 기쁨이 사라졌을 때, 주님이 계시니 기쁨이 회복됩니다. 이처럼 주님은 기쁨을 잃어버린 세상에 기쁨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려고 메시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경의 첫 이야기를 새롭게 발견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 안에서 누리시는 완전한 기쁨을 나눠주셔서, 사람이 그 기쁨을 누리면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을 즐거워함으로 영광을 받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처음 두신 동산의 이름을 ‘에덴’ 즉 ‘기쁨’이라고 명명하셨지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일을 먹음으로 범죄하기 전까지의 이야기는 기쁨으로 충만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잘못 사용함으로써, 범죄하게 되고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깨뜨리고 맙니다.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지혜와 만족과 기쁨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실패하는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기쁨 (에덴)이 사라진 땅에 예수님께서 걸어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곳에 기쁨을 회복시켜 주려 하십니다. 죄로 말미암아 깨어진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성취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기쁨 (포도주)은 한 집에서 벌어지는 잔치에 소비하기에는 불가능할 만큼 어마어마했습니다. 또한 이 기쁨은 언제나 지금보다 나중이 낫습니다. 영원히 그렇습니다.
이 영광과 기쁨이 교회에 있습니다. 우리의 목장과 교회가 주님이 걸어들어오심으로 경험하게 되는 이런 기쁨 아래에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기쁨을 잃어버린 세상을 향해, 우리의 VIP를 향해 ‘와 보라’고 자신있게 외칠 수 있게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