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3:13~18
13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14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18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오늘 설교 제목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분별하는 법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사람을 만나면 심한 거부감과 함께 궁금함을 느낍니다.
오늘 이 자리에 앉아 계신 분들 가운데도 제가 이전에 느꼈던 심한 거부감과 더불어
궁금함을 가지신 분들이 계시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사람을 만나면 어떻게 들었는지 구체적으로 물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하시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분들의 거의 대부분은
특별한 생각이 났다는 말입니다. 그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은 꼭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말하기보다는 이런 저런 생각이 났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직한 표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 성경구절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이 구절은 아주 간단한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는 분이신데, 말씀하시는 방법이 변했다는 것입니다.
* 히브리서 1장 1~2절
옛적에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예언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몇몇 특별한 예언자들은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지만
일반 백성들을 예언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마지막 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는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해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지 않으니 더 이상 말씀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땅을 떠나시면서 제자들에게 그리고 저와 여러분들에게
성령님을 보내 주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다 같이 다음 슬라이드에서 요한복음 14장 26절만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내어 주실 성령님께서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해서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생각이란 것이 아주 특별한 것입니다. 생각은 내가 주체가 되어서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생각은 그저 떠오릅니다.
내가 주체가 아니고 수동적으로 떠오른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 2절을 보면 마귀가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집어넣었다고 말씀해 줍니다.
성령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생각나게 해 주실 수도 있고
마귀도 저와 여러분에게 생각을 집어 넣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생각이라는 현장은 성령님의 음성 마귀의 음성 그리고 나의 음성이
함께 섞여 있는 공간이라고 말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에게는 내 속에서 떠오른 생각이
하나님의 음성인지, 마귀의 음성인지, 그저 나의 생각인지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는가?
그 구별을 100% 확신할 수 있겠는가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다음 성경 구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이구절은 인류 역사상 하나님의 음성을 가장 잘 들은 모세의 이야기입니다.
* 출애굽기 3장 11~12절
모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물론 소리로 들었는지 생각으로 들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난 뒤에 확신이 서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모세에게 주신 증거가 무엇입니까?
“네가 그 백성을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될 것인데,
이것이 내가 너를 부른 증거다.”
하나님께서는 미래의 증거 결과의 증거를 제시하셨습니다.
100% 확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믿음의 삶을 사는 데는
반드시 위험을 감수하고 순종하는 “모험”이 필요한 것입니다.
다음 성경말씀을 함께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이번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사도바울의 이야기입니다.
* 사도행전 16:9~10
바울이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환상을 통해서
우리를 마게도냐로 보내시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함께 한 팀은 그것을 분별해서 우리를 부르시는 줄로 “인정” 했습니다.
물론 분별하는 시간이 짧았을 수는 있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분별하고 판단하고 “인정”하는
과정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100% 확신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인정”하고 그 길을 떠납니다.
모험을 하는 것이고, 그 결과를 통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의 증거를 미래에 얻게 되는 것입니다.
시온영락 가족여러분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뜻에 대한 100% 확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저 7~80% 이건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각이야하는 느낌이 들면 한 번 순종의 모험을 해 보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순종해 가는 가운데 결과를 통해서 확인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고 고백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을만한 증거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지 못할 증거도 많습니다.
그런데 믿지 못할 증거보다 믿을만한 증거가 훨씬 많다면 7~80% 된다면
한번 믿기로 결정해 보는 것입니다. 믿음은 선택이고 결정이고 모험입니다.
나머지 2~30%는 하나님께서 결과를 통해서 경험을 통해서 확인해 주시는 것입니다.
저도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예수 믿어서 손해 볼 것 뭐 있나 하는 생각으로
30년 전에 이 길로 접어 들었다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증거들 때문에 목사의 자리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자 이제 내 마음속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생각들 가운데
무엇이 하나님께서 주신 생각,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음성인지
무엇이 마귀가 집어넣은 생각, 마귀의 지혜, 마귀의 음성은지
분별하는 기준을 확인해 보도록 하십시다.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야고보서 3장 15절과 16절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이러한 “지혜”라고 되어 있는데
“지혜” 대신에 “생각”이라고 집어넣어도 되겠습니까?
이런 생각은 개역성경은
땅위의 생각이요
정욕의 생각이요
귀신의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은 앞에 나온 것을 가르키는 지시대명사니까
바로 앞의 구절을 읽어보면
이러한 생각이 어떤 생각인지 알 수 있습니다.
13절과 14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13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14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이러한 생각은 어떤 생각입니까?
독한 시기와 다툼을 동반한 생각입니다.
그 지혜가 그 생각이
하늘의 것인지 마귀의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결과가 증거가 됩니다.
결과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독한 시기와 다툼을 동반한 생각들은
지독한 경쟁심에서 나온 생각들은
결국은 시기와 다툼을 일으키고
거기에서 요란과 온갖악한 일이 다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귀의 것입니다. 세상적이고 정욕적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위로부터 난 지혜, 하나님의 음성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다음 구절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18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위로부터 난 지혜 하나님의 음성은 아주 분명한 특징이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좀 더 쉽게 볼 수 있도록 표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다음 슬라이드로 넘겨 주세요.
하나님의 음성의 첫 번째 특징이 뭡니까?
성결합니다.
깨끗합니다.
성결함의 반대말이 뭔가요? 더러움입니다.
마귀의 생각은 더럽고 지저분합니다.
깨끗한가 더러운가를 보면 금방 구별이 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의 두 번째 특징은 무엇입니까?
더러운 생각에 대해서는
두 번째 특징을 생각하며 분별해 볼 필요도 없습니다.
성결한 깨끗한 생각이니까
좋은 생각이니까
이게 정말 하나님의 음성이 맞나를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고 긍휼하고 선합니다.
다 같은 것을 이야기 합니다.
따뜻하고 부드럽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따뜻하고 부드럽습니다.
그래서 평화롭습니다. 평화가 찾아옵니다.
마귀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시기와 다툼이지요...
날카롭습니다.
조급합니다.
격정적입니다.
그래서 불안합니다. 초조합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초조하게 나를 밀어 붙이는 생각이 떠오르면
지금 당장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조급함이 있으면
이것은 마귀의 것이구나 생각을 해도 거의 틀리지 않습니다.
생각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이 두 가지만으로도
거의 구별할 수 있습니다 .
깨끗한가 더러운가?
따뜻하고 평화로운가?
날카롭고, 조급하고, 초조하고 불안한가?
거기에 더해서 마귀의 음성은
편파적입니다. 거짓과 위선이 담겨 있습니다.
편파적이라는 한쪽 면만 본다는 것입니다.
어느 쪽 면만 보겠습니까?
자기에게 유리한 쪽만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기적입니다.
나에게 조금만 손해가 되어도
조급하게 분개하고 흥분하며
“아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라고 외칩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양쪽을 다 볼 수 있게 해 줍니다.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릴 수 있도록 마음의 여유를 줍니다.
그래 그럴수도 있지.... 하는 여유로움 가운데
상대방을 배려한 지혜가 솟아납니다.
하나님의 생각에는 거짓과 위선이 담길 수 없습니다.
진실하고 정직합니다.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아브라함의 지혜는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지혜가 아닙니다.
차라리 이 여인은
내 아내입니다.
나는 두렵습니다.
여러분들을 믿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라고 진실하고 정직하게 말할 일이었습니다.
이제 설교를 맺으려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결과를 통해서만 증명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깨끗하고, 따뜻하고 평화롭고,
상대방의 입장을 배려하고 진실하고 정직한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음성이 가져다 주는 결과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화평”입니다.
마지막 성경구절 함께 읽겠습니다.
* 마태복음 5장 9절
공동체 가운데
누가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입니까?
누가 신령한 사람입니까?
누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입니까?
입으로 떠드는 것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이 가는 곳에는
싸움이 증폭되는가?‘
평화가 증폭되는가?
내가 말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가?
쉽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싸움이 일어날까? 평화가 찾아올까?
지난주에 히브리서 말씀을 보아서 살펴본 것처럼
종교인들이 조심해야 할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무나 본받으면 안 됩니다.
그들의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 다음에 함께하고 본받아야 합니다.
중간에 서서 전할 필요가 없는 남의 말을 전하며
평화가 아니라, 사람 사이를 이간질하고
분열과 불신을 가져오는 사람들은
기대하고, 의지하고, 신뢰해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미워할 대상은 아닙니다.
오히려 불쌍히 여기며 섬겨주어야 할 분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속아주기도 하며, 이용당해 주기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신령한 사람입니까?
나는 성숙한 사람입니까?
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사람입니까?
내가 하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로
구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도 광명의 천사 노릇을 하며
천사의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면 평화로운 관계도 깨어지고 싸움이 일어나는가?
내가 가면 깨어진 관계도 화해되고, 평화가 일어나는가?
저와 여러분은 영의 귀가 활짝 열려서
화평케 하시는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며
그 열매가 항상 나타나는 사람, 가정, 목장, 교회 되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도록 도와주소서
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고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며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