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
2 |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
3 |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
4 |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
5 |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
6 |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
7 |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
8 |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
오늘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선지자의 사명으로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부르실 때,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으로써 이사야에게 “네가 가라”고 명령하실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마20:25~26)”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향하여 임의로 주관하고, 권세를 부리실 수 있는 자리에 계셨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서 1장부터 5장에서 보는 것처럼, 이사야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관하고 명령하는 대신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사6:8)” 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이사야에게 선택권을 주십니다. 절대적인 권능을 가지셨지만 피조물인 인간을 존중하시며 대등하게 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만 비로소 진정한 사랑의 관계가 형성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응답만이 하나님께 참 기쁨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실 때도 다른 것을 묻지 않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단 한 가지를 세 번이나 질문하셨습니다. 같은 질문을 세 번이나 반복해서 들은 베드로는 근심하며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 알고 계신 베드로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목숨까지 버리겠다고 호언장담하는 큰소리치는 사랑이지만, 정작 진짜 위험이 눈앞에 닥쳐왔을 때는 예수님을 저주하고, 맹세하고 부인하는 그런 나약한 사랑, 배신하는 사랑, 부족한 사랑이었습니다. 내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쉽게 넘어짐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사랑, 바로 그 자발성의 선택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고 존중하십니다.
이사야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라고 하나님께 고백합니다. 결코 쉬운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짐승만도 못하게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반하는 백성들 가운데, 어쩌면 열매가 없을 수밖에 없는 사역 가운데 뛰어드는 선택이었습니다. 이사야는 왜 “나를 보내소서!”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 1장에는 “슬프다”는 선언이 반복됩니다. 이사야가 6장에서 본 하나님은 절대권능의 하나님이셨습니다. 거역하는 백성들 그냥 심판으로 쓸어버리시고 새역사를 시작하셔도 되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심판하시겠다고 선언하시면서도 슬퍼하십니다. 심판하기 싫으신, 그들을 회복시키시고 건져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의 마음이 심판의 선언에 슬픔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