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8:18~22
18 나의 기쁨이 사라졌다. 나의 슬픔은 나을 길이 없고, 이 가슴은 멍들었다.
19 저 소리, 가련한 나의 백성, 나의 딸이 울부짖는 저 소리가, 먼 이국 땅에서 들려 온다. (백성이 울부짖는다.) "이제 주님께서는 시온을 떠나셨단 말인가? 시온에는 왕도 없단 말인가?"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어쩌자고 조각한 신상과 헛된 우상을 남의 나라에서 들여다가, 나를 노하게 하였느냐?"
20 (백성이 또 울부짖는다.) "여름철이 다 지났는데도, 곡식을 거둘 때가 지났는데도, 우리는 아직 구출되지 못하였습니다."
21 나의 백성, 나의 딸이, 채찍을 맞아 상하였기 때문에, 내 마음도 상처를 입는구나. 슬픔과 공포가 나를 사로잡는구나.
22 "길르앗에는 유향이 떨어졌느냐? 그 곳에는 의사가 하나도 없느냐?" 어찌하여 나의 백성, 나의 딸의 병이 낫지 않는 것일까?
오늘의 말씀은 세 종류의 사람들의 이야기가 함께 섞여서 나오는 본문입니다. 첫 두 음성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자신의 처지가 힘들다는 백성들의 탄식에 하나님은 그것은 너희의 죄악 때문이 아니냐고 반문하십니다. 여기에 백성들은 여전히 자신의 처지에 대한 한탄으로 반응합니다. 그 이유는 “자기연민” 때문입니다. 자기연민은 자기의 처지를 끊임없이 합리화하면서 자기를 늘 불쌍히 여기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하고, 자신을 위로해줄 대상을 찾아다닙니다. 그런데 이들은 어느새 이 슬픔을 즐기기 시작하고, 다른 사람들까지 자신의 슬픔으로 끌어드립니다. 그래서 점점 부정적인 생각과 자기고집이 강해집니다. 가인처럼 이들은 자신의 일에 대해서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위로받아야 할 존재이고, 자신의 안타까운 상황을 다른 모든 사람들은 다 이해해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연민의 사람의 삶은 스스로와 관계에 있어서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런 자기연민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다음의 세 문장에 들어있습니다.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잊지 말 것! 나를 바라보지 말고 위를 보고 살 것!! 옆을 보고, 또 아래를 보고 살 것!!!”
첫째, 익숙함이란 자기가 중심이 되어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이해하려는 삶의 방식을 말합니다. 소중함이란 그 속에 있는 관계를 말하는 것이구요. 자기연민의 사람은 세상을 나를 중심으로 한 동심원의 구조로 바라보는 것이 익숙합니다. 하지만 우주의 중심이 내가 되는 관계가 아니라, 중심되시는 주님 안에서 관계 자체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하면 삶이 달라집니다. “나를 위한 관계”라는 익숙함에서 벗어나서 “관계 속에서의 나”라는 소중한 가치를 품을 때 자기연민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둘째, 내 삶을 정말로 힘들게 하는 것은 고통이 아니라, 자기에 대한 극도의 사랑 그 자체입니다. 내가 가시에 찔린 것이 다른 사람의 뼈가 부러진 것보다 더 아프고 힘든 이유는 자기의 의식과 관심이 오직 자기를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우주 전체에서 가장 억울하신 일을 당하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삶으로 자기연민에 빠져들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자기의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향한 사랑으로 십자가를 지시고, 나를 용서하시고, 내 곁을 지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특별히 불쌍한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특별히 사랑을 받은 존재입니다. 나를 바라보지 말고 위에 계신 주님을 볼 때, 우리는 자기연민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셋째, 옆을 보고, 또 아래를 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세 종류의 음성 중 마지막 음성은 예언자 예레미야의 말입니다. 그는 아픔을 피하려 하지 않고, 그 아픔 속에서 오히려 타인을 공감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아픔이 경험되기 때문에 그들을 위한 중보자로 서 갔습니다. 중보는 타인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내 삶의 문제가 다 해결되고난 이후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삶에 아픔과 고난이 찾아왔을 때, 우리는 그것이 내게 특별하게 찾아왔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아픔을 지니고 살아가는 내 주변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질 때 가능해집니다. 이 삶이 “상처입은 중보자”의 삶입니다. 그리고 이 삶이 우리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삶입니다. 여기까지 우리가 함께 나아갈 수 있게 되기를 깊이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