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9:1~7
1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1)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3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4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5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성경은 우리에게 노아, 아브라함, 모세, 다윗과 같이 기다림을 통과하면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은혜의 문을 통과하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지루함 때문입니다. 기다림을 단지 “우리가 현재 있는 곳과 우리가 가야할 곳 사이에 놓여있는 광야” 정도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기다림은 우리를 깊게 만들어가는 통로이기 때문에 기다림 자체로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어떤 방향으로 깊게 만들어가는 걸까요?
우리는 기다림을 통해서 우리를 기다리시며, 자기의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한 사람도 잃고 싶지 않기 때문에, 돌아올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베푸시며, 우리를 위해 참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 (베드로후서 3:9) 을 배우는 시간으로 우리의 기다림이 채워지면, 우리는 기다림의 결과를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속에서 내가 변하는 자체로 행복해질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우리의 기다림이 행복한 이유는 약속이 이미 주어졌고, 약속을 따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이미 던져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다림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완성해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이루어진 약속을 기다림으로 받게 될 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약속하셨고 이미 이루신, 우리의 기다림의 대상인 그 분은 어떤 분이신가요?
첫째로, 그 분은 기묘한 조언자이십니다. 조언자이신 그 분은 내 삶을 마구 깨고 들어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삶의 변화를 기대하고 이끌어가되 친절하고 예의있게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마음에 찜찜함과 감동으로 말씀하시는 그 분의 음성을 듣는 방법을 우리는 QT라고, 또한 삶공부라고 합니다. 새로운 해에는 하나님의 기묘한 조언이 우리의 삶 속에 늘 함께하도록 하나님이 주신 이 통로에 기쁨의 결단으로 서 있을 수 있는 시온영락 가족들이 되어 가십시다.
둘째로, 그 분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은 아들을 사랑하지만 정말 필요할 때에 아무 일도 해주지 못하는 세상의 아버지와 같지 않습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그 분이 내 삶을 승리의 길로 이끌어 가십니다. 어디까지요? 영원까지요!
셋째로, 그 분은 평강의 왕이십니다. 평강은 관계 속에서 찾아옵니다. 그리고 관계를 이어주는 가장 중요한 단어는 “경건”입니다. 우리말로 “경건”이라 번역된 헬라어 “유세베이아”는 “잘 섬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경건은 금욕함으로 깊이 삼가고 조심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서 1:26-27은 경건을 ‘위선하지 않는 것’과 ‘이웃을 잘 섬기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분은 이런 분입니다. 이 분을 기다리며, 이 분을 닮아가기 위한 노력을 우리 삶에서 해보지 않으시렵니까? 개인으로, 가정에서, 목장에서, 직장과 교회에서, 이런 분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살아가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