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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에서 사탄의 주장은 세상에 사랑의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직 거래관계만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세 친구들의 주장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기계적 관계라는 주장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동에 따라 반응하는 기계입니다. 그러므로 욥이 당하는 이 엄청난 재앙을 보니 욥은 틀림없이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평소 욥은 의인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더 악날한 죄인이요 위선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세 친구들에 대한 욥의 주장은 무엇입니까? 욥이 마치 자신이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욥의 주장은
나는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런 죄인 그 정도의 죄인은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억울하고 답답해서 견딜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 억울함을 풀어주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섭섭하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대한 엘리후의 대답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엘리후는 욥에게도 그리고 욥의 세 친구들에게도 화가 났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엘리후의 주장은 한가지입니다. 생각하는 틀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경험하는 현실에서 출발해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크심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엘리후의 주장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크심과 하나님의 자유,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나님은 크시기 때문에 대답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원하는 방식으로 대답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유로우십니다. 오히려 인간들이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방식에 맞추어야 합니다.
엘리후의 두 번째 주장은 크고 자유로우신 하나님은 인간의 선행과 악행을 따라 상주고 벌주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 보다 더 큰 목적과 의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당신의 목적과 의도를 위해서 인간이 생각하기에 상을 주어야 할 때 상을 안 주실 수도 있고, 벌을 주어야 할 때 벌을 안주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엘리후의 세 번째 주장은 하나님의 크심은 너무나도 광대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을 저와 여러분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선택하셨을 때 그것이 선일지 악일지 내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더 크신 계획을 인간인 내가 알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의 창조의 신비조차 풀지 못하는 인간이
하나님의 세상을 운영하시는 경륜의 신비를 어떻게 풀 수 있겠습니까?
엘리후의 대답에 동의가 되십니까? 엘리후의 대답은 세 친구들의 대답보다는 훨씬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설득력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리고 설사 정답이라고 하더라도 그러나 욥의 고통과 아픔을 충분히 나누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너무나 크고 끔찍한 고통의 현실을 직면하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대답이 되지 못합니다. 욥기에서 하나님의 대답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정답이 답이 되지 않고, 하나님의 임재가 답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정답을 주려고 하지 맙시다. 정답을 말하기보다 그냥 함께 있어주고, 경청해 주도록 합시다. 하나님의 임재가 임할 수 있도록 섬깁시다. 내가 정답을 주기보다 하나님께서 임재 하셔서 정답을 주시도록 섬겨 보십시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도록 섬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첫째는 기도이고 둘째는 나에게 같은 아픔이 있었을 때 경험한 나의 하나님의 임재 경험에 대한 간증입니다. 이것이 목장에서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목장은 경청과 간증으로 풍성해 집니다. 경청은 질문으로 더 깊어집니다. 같은 아픔을 경험한 사람의 간증이 우리의 마음을 만져 줍니다. 그리고 함께 기도할 때 신비한 하나님의 임재가 머리에 있는 정답을 가슴으로 끌어내려 주는 것입니다.
“즐거워 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12:15)“ 정답은 잠시 제쳐놓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어보십시다. 그리고 기도해드리며 기다려 보십시다.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라 하더라도 함께 아파해 주고 함께 울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래도 버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면서 측량할 수 없는 은총의 통로고 바뀌어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