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Rf6Wtqf0VK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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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9:1~10>
예수께서 여리고에 들어가 지나가고 계셨다.
삭개오라고 하는 사람이 거기에 있었다. 그는 세관장이고, 부자였다.
삭개오는 예수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려고 애썼으나, 무리에게 가려서, 예수를 볼 수 없었다. 그가 키가 작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보려고 앞서 달려가서, 뽕나무에 올라갔다. 예수께서 거기를 지나가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러서 쳐다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서 묵어야 하겠다."
그러자 삭개오는 얼른 내려와서, 기뻐하면서 예수를 모셔 들였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서, 모두 수군거리며 말하였다. "그가 죄인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갔다."
삭개오가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하여 갚아 주겠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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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로 받은 구원, 나누며 삽시다>
삭개오의 이야기는 18장의 메시지와 연결해서 보아야 제대로 보입니다. 누가복음 18장은 스스로 자격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계속 비교합니다. 바리새인과 세리, 제자들과 어린아이, 앞서가는 사람들과 시각 장애인 말입니다. 이 중 바리새인과 제자들과 앞서가는 사람들은 스스로 구원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렇지 못했습니다. 자기의 소유를 팔아서 나누어주라는 주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하는 부자관원의 모습이 이것을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의 삭개오는 이 모든 자격 없는 사람들을 대표합니다. 삭개오는 앞서 자격 없는 사람들의 모든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세관장이었고, 키가 작았으며, 많은 사람들로 인해 예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같은 삭개오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오롯이 드러나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달을 수 있는 시간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여리고에 예수님이 들어가십니다. 가나안 정복전쟁 당시에 여호수아에 의한 여리고의 점령은 승리의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오늘 여호수아와 이름이 같은 예수님이 여리고로 들어오신 것은, 이제 철옹성 같던 이 땅의 세력을 몰아내고 하나님 나라가 시작될 것이라는 신호탄이 됩니다.
삭개오는 세관장이자 부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키가 작았기에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뽕나무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갑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볼썽 사나운 모습일지 모르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열매없던 무화과 나무 (누가복음 13장)에 맺힌 열매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삭개오를 보면서 예수님은 오늘 그 집에서 머물러야 하겠다고 말씀합니다. 죄인과 같이 머물며 죄에 동조하는 것이 되어 추방해야 하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습니다. 이것을 아시면서도 예수님은 삭개오의 집에 들어감으로 그와 하나가 될 것을 말씀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죄인을 회개시키는 방식입니다. 죄인과 하나가 됨으로 그들의 죄를 자신의 죄로 여겨 그 값을 대신 지불하는 것! 이러한 예수님의 대속으로 삭개오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자녀가 되는 기적이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이 많은 것을 포기하고 자기 집으로 왔다는 것을 잘 아는 삭개오는 예수님에게 모든 소유를 포기하겠다는 결단을 합니다. 스스로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던 부자 관리가 따르지 못했던 그 길을 삭개오는 걷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자격 없는 사람이 구원에 이를 자격을 얻게 되었습니다.
삭개오가 그랬듯 우리도 자격이 아니라 은혜로 받은 구원임을 알 때, 그것을 나누고 싶어집니다. 섬김이 일상이 됩니다. 내가 받은 구원이 남을 판단하는 도구가 되지 않고, 그 구원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간절한 마음으로 섬기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집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줍시다. 거저 섬겨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