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존재방식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서로를 깊이 사랑하고 믿고 의지하는 공동체의 존재방식입니다. 하지만 팬데믹 이후 우리는 어쩌면 고립과 고독이 일상화되어서 목장과 교회에서도 영적인 친구를 가지는 것에 대하여 특별히 큰 기대를 가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영적인 친구들을 가지고 있습니까?
성경은 아브라함과 모세를 말할 때, 그들이 하나님의 친구였다고 표현합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소돔과 고모라에서 하나님이 하실 일을 알려주셨기에, 또 모세에게는 창조 때부터 그에게 있던 계시를 알리시며 그에게 비밀을 털어놓으셨기에 이 두 사람은 하나님의 친구라고 일컬어졌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또 자신의 십자가 죽음이 친구를 위한 죽음이라고 말씀하시며 그의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친구들에게 하나님과 그 분의 뜻을 바라보게 하셨고, 이처럼 ‘친구’라고 불린 이들은 나란히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고 그 분의 뜻에 자기의 삶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C.S. 루이스의 ‘네 가지 사랑’에 의하면 우정은 다른 사랑처럼 필수적인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생존을 가치있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입니다. 우정은 “뭐! 너도?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라고 말하는 순간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나를 우정합니까’라는 의미가 ‘당신도 같은 방향을 보고 있습니까’ 혹은 ‘당신도 이 방향에 관심이 있습니까’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 점에서 연인과 친구는 다릅니다. 연인은 서로를 바라보며 서로에게 빠져있습니다만, 친구들은 나란히 앉아 공통된 관심사에 빠져 함께 앞을 바라보게 됩니다. 내가 보고 있는 방향이 있는데, 누군가도 내가 보고 있는 그 방향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우정이 발생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이런 우정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개개인이 그리스도에 대한 깊은 끌림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 개개인의 마음이 끌리는, 지속적으로 바라보는 이상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우리 인생에 자기를 이해해주고 외로움을 달래줄 친구를 찾는 감상적인 경향으로 교회 안에서 우정을 구하고 있다면 영적우정을 맺는 것이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우정은 ‘당신도 같은 방향을 보고 있나요?’라고 묻는 사람과, ‘나도 당신이 보고 있는 그 방향이 보입니다’라고 대답하는 사람 사이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So What?
1. 선명한 구원의 확신을 확인하고 서로 나누어 보십시다.
2. 예수님의 소원을 이루어드리는 일이 우리가 지속적으로 바라보는 이상이 되어가도록 하십시다. 가서 제자를 삼고,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일을 함께 바라보며 가십시다.
3. 증오나 불만의 공유로 인해, 그 불평을 들어주는 사람을 내 편으로 만드는 방향으로 만들어지는 우정을 경계하십시다. 그것은 결국 자신과 공동체를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