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희 박사의 女子 토크] 매일
엄마와 전쟁을 치르는 딸들이여, 벗어나라 엄마의 품을
영선씨는 아침 일찍 "엄마,
생일 축하해" 하는 딸의 목소리에 비로소 오늘이 생일인 줄을 알았다. 자신도 깜빡 잊고 있었는데 예쁜 귀걸이 선물까지 받고 보니 딸 가진 기쁨에 가슴이 뿌듯하다. "그래 고맙구나, 네가 내 딸이라는 것이!" 엄마와 딸의 관계는 애틋하다. 때론 친구처럼 또는 인생의
선후배처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 가는 존재다.
딸에게 엄마라는 존재는 더 특별하다. 엄마는 딸이 어린 소녀에서 한
여성으로 성장하는 모든 시기에 최우선적 역할 모델이 된다. 어떤 친구를 만날지, 어떤 남자를 사랑할지, 결혼하면 어떤 아내와 엄마가 될지 모두 엄마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딸에게 엄마는 가장 가까운 존재다. 그러나
동시에 가장 벗어나고 싶은 그 무엇이기도 하다.
대학교 2학년 정연씨는 매일 엄마와 전쟁을 치르고 있다. 집에 가면 엄마와 자꾸 싸우게 되고, 엄마는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니?"라며 눈물을 쏟으니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이제껏 아빠한테 무시당하고 사는 엄마가 불쌍해서 엄마 뜻을 거스를 생각조차
못 했는데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엄마를 떠나고 싶다.
가장 가깝지만 그만큼 날카롭고 깊은 상처를 주는 관계, 사랑하는 만큼
미워하는 모녀 사이. 인기 드라마에 단골로 등장하는 모녀 갈등을 보면 엄마와 딸 사이의 복잡하고도 미묘한
애증 관계가 여실히 드러난다.
"왜 이렇게 생(生)이 재미가 없을까요? 선생님 죄송하지만 사실 죽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먼지처럼 사라지는 방법 없나요? 가만 생각해보니 어렸을 때 우울하고
무기력했던 엄마가 떠오릅니다. 엄마는 기분 나쁘면 온종일 밥도 안 차려주던 엄마였지요." 우울증 치료를 받고 있는 정아씨는 물기 어린 눈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엄마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듯이 나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거 같아요."
3년 전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그녀에겐 폭식이 시작되었다. 배가 고파 먹는 게 아니라
아주 빠른 속도로 무섭게 집 안의 모든 음식을 먹어버린다.
38세 서연씨는 최근 아들을 심하게 다루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말 안 듣는 아이가 밉기도 했지만 정도 이상으로 화를 내고 체벌을 가하는 모습에 심한 자책감이 몰려왔다. '혹시 내가 나의 문제를 대물림하고 있는 건 아닐까?' 불안한 마음에
이런저런 육아서를 읽어보지만 자신이 엄마의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어 어떻게 아이를 사랑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녀는 말했다. "사랑은 글로 배우는 게 아니잖아요." 아무리 좋은 성적표를 갖다 드려도 화만 내고 때렸던 엄마 역시 할머니로부터 심한 신체적 학대와 욕설
속에 성장했다고 한다. 그녀는 성인이 된 지금도 가끔 엄마가 바뀐 것 같다는 공상을 한다.
우울증, 거식증, 감정
기복의 증상들을 따라가다 보면 예외 없이 그녀들의 엄마를 만난다. 정아씨와 서연씨의 우울과 폭식, 학대의 뒤에도 어김없이 엄마가 있었다. 정신과 진료실에서는 3대에 걸쳐 불행이 반복되는 예를 무수히 만난다. 누구나 무의식중에
부모로부터 영향을 받아 인격을 형성하고, 또 그런 '내'가 자녀들에게 영향을 주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 만나는 사람인 엄마하고 행복하고 좋은 경험이 있어야 한다. 엄마와 맺은 관계가 평생의 인간관계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좋은 엄마를 만나는 행운이 내게 오지 않았다면, 엄마와 맺은 관계에서 풀지 못한 숙제를 안고 있다면, 한번 찬찬히 생각해 볼 일이다. 아직도 그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건 아닌지. 성인이 된 딸들에게 애증의 대상인 내면의 엄마는 지워야 할 과거다. 딸은 자신을 억누르는 엄마의 그늘을 모두 지우고, 엄마가 바뀔 수 있다는 미련조차 버리고 떠나야 한다. 이제 당신에겐 새로운 관계를 향한 능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