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6KFXWAa2Kj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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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8:2~11)
이른 아침에 예수께서 다시 성전에 가시니, 많은 백성이 그에게로 모여들었다. 예수께서 앉아서 그들을 가르치실 때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간음을 하다가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워 놓고,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런 여자들을 돌로 쳐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들이 이렇게 말한 것은, 예수를 시험하여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몸을 굽혀서,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다.
그들이 다그쳐 물으니, 예수께서 몸을 일으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리고는 다시 몸을 굽혀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다.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나이가 많은 이로부터 시작하여, 하나하나 떠나가고, 마침내 예수만 남았다. 그 여자는 그대로 서 있었다.
예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사람들은 어디에 있느냐? 너를 정죄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느냐?"
여자가 대답하였다. "주님,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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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은혜가 세우는 공동체입니다)
사회학자 퇴니스에 의하면 인간의 집단은 애정을 기초로 이루어지는 공동사회 (게마인샤프트)와 타산적 이해에 얽혀 이루어진 이익사회 (게젤샤프트)로 분류됩니다. 가족과 교회는 대표적인 공동사회의 모델이구요. 가족은 혈연을 근거로 애정이 형성된 공동체이니 당연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만, 교회가 하나님의 가족이라 할 때, 교회 안에서의 애정 관계를 엮어주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의 개요는 이렇습니다. 유대인의 3대 절기 중 하나인 초막절 행사가 끝난 다음 날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성전에 오셔서 가르치는 중이었는데 갑자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한 여인을 데리고 들이닥칩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음행의 현장에서 발각된 여인이었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에게 “모세는 율법에, 이런 여자들을 돌로 쳐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뭐라고 하시겠습니까?”라고 질문합니다.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기 위해서였죠. 당시 로마법은 식민지 국가에 사형을 허용하지 않았으니, 율법대로 돌로 치라고 대답하면 정부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이 됩니다. 만일 살려주라고 하면 율법을 어기는 사람이라는 딱지를 붙이면 되는 거지요. 이 상황에서 예수님은 이들에게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고 말씀하십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사람들은 양심에 가책을 받아 하나씩 집으로 돌아갑니다. 이제 예수님과 여인만 남았을 때, 예수님은 그녀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라고 말씀하시지요. 여기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자기 의로 가득한 심판자)
이들은 율법과 정의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거짓된 정치적 술수로 의로운 사람을 잡아 죽이려는 생각으로 채워진 사람들이었지요. 이들은 자기가 너무나 옳아서 회개할 것이 없습니다. 성경으로 포장하지만 자기에게는 은혜가 필요없다고 여깁니다. 이미 충분한 자격이 있으니까요. 이런 사람 옆에 있으면 숨이 막힙니다.
2. 간음하다 잡힌 여인 (용서의 은혜를 받은 사람)피할 수 없는 죄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바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긍휼함과 용서입니다. 자아의 존귀함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용서의 은혜가 필요한 모든 죄인들을 대표하지요.
3. 예수님
모든 이들이 죄의 권세 아래 있으므로 용서의 은혜가 필요함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용서를 허락하고 그 은혜가 커서 다시 죄를 짓는 자리로 돌아가지 않도록 만드시는 분입니다.
가정이 혈연으로 묶인 공동체라면, 교회는 이런 용서를 경험한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 가지를 공유하는 특징을 가집니다:
1) 용서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공동체;
2) 판단과 정죄의 시선에서 용서와 긍휼의 시선으로 변화된 사람들의 공동체;
3) 죄인을 용서하고 용납하는 공동체.
옳음과 바름은 비록 매우 중요하지만 교회는 은혜가 세웁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부으시는 은혜가 나를 채워 이웃으로 흘러가는 주님의 “게마인샤프트”를 만들어 가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