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0:1-10>
1.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사람은 도둑이요 강도이다.
2.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양들의 목자이다.
3.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서 이끌고 나간다.
4. 자기 양들을 다 불러낸 다음에, 그는 앞서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라간다. 양들이 목자의 목소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5. 양들은 결코 낯선 사람을 따라가지 않을 것이고, 그에게서 달아날 것이다. 그것은 양들이 낯선 사람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6.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씀하시는지를 깨닫지 못하였다.
7.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8.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은 다 도둑이고 강도이다. 그래서 양들이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9. 나는 그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얻고, 드나들면서 꼴을 얻을 것이다.
10.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파괴하려고 오는 것뿐이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더 넘치게 얻게 하려고 왔다.
<생명의 깊이를 경험하십시오>
지금껏 인류가 나타난 후 지구에서 살아간 사람들을 다 합하면 대략 750억명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앞으로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게 되겠지요. 지금은 죽어 없어진 사람들은 지금 어떻게 된 것일까요? 앞으로 오랜 후의 우리 후손들은 우리를 어떻게 기억할까요? 이런 질문은 본질적으로 ‘생명이 무엇인가?’라는 아득한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질문을 했던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는 생명이자 빛이라고 (1:4), 혹은 길과 진리와 생명이라고 (14:6) 묘사합니다. 즉,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 땅에서 잠시 살다가 죽으면 아무 흔적도 남지 않는 것이 우리의 인생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 것인가요?
오늘 본문이 포함된 요한복음 10:1-18은 예수님을 ‘양의 문’, 혹은 ‘선한 목자’ 로 표현합니다. 목자는 양의 생명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양을 잡아먹는 포식자의 위험이 왔을 때 자기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그 양을 위해 던지는 사람이 목자입니다. 하지만 오늘의 본문에서는 목자를 도둑이 아닌 사람이라고 묘사합니다. 도둑은 양을 죽이고 멸망시키는 사람이고 목자는 생명을 풍성하게 주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지요. 위선으로 채워져서 타인을 이용해서 자기의 욕망을 채우려고 하는 사람들이 바로 도둑들이지요. 내 삶의 불편함을 감수하고도 양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이 목자이구요. 이렇게 보면 너무 달라 보입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그걸 구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위선하던 백성의 지도자들과 예수님 중 다수의 사람들이 더 옳다고 인정했던 사람은 예수님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했을 이유가 없지요. 그들은 예수님을 유랑 랍비 중 한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들과는 다르게 그의 제자들은 그를 생명의 근원이라고 고백합니다. 이런 생각의 근거가 무엇일까요? 이 근거를 사람들에게 제시할 수 있을까요? 실제로 지금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이 즉 삶이 더 풍성해 졌을까요? 예수님의 삶을 보아도 생명보다는 죽음에 가깝습니다. 삼십대 초반의 나이에 십자가 선고를 받아서 죽은 사람! 당시에는 아무도 이런 죽음을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23).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길이 생명을 얻는 길이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이들처럼 여러분도 고난당하고 십자가에 처형당한 이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의 풍요를 실제로 경험하셨나요? 더 직접적으로 표현하면, 여러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받으셨습니까?
이런 질문이 낯선 이유는 우리가 생명의 깊이를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깊이는 얼만큼일까요? 우리는 한 달이라는 시간 안에서 볼 때와 10년, 혹은 100년이라는 시간 안에서 볼 때, 지금의 현재를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깊이는 태초부터 (요한복음 1:1) 종말까지입니다. 역사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예수님의 생명의 깊이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아득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태초부터 종말에 이르도록 풍성하고 깊게 채워져 있는 예수님의 생명은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미칩니다. 마치 우주의 첫 시작에 함께 있었던 중력이 지금 우리의 삶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말입니다. 태초의 창조 사건에 참여한 예수님이 가지시고 그 분만이 이루실 수 있는 절대적인 생명의 경험, 그것이 부활입니다. 주님의 부활 안에 있는 절대적인 생명 경험을 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 삶 속에 있는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죄는 내가 나의 주인이 되어서 내 삶을 컨트롤 해야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자기의 기준에, 타인의 평가에 자신을 맡기고 살면서 좌고우면하다가 교만이나 자책의 수렁에 빠져 영혼의 평화를 놓칩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태초부터 종말에 이르는 그 생명의 깊이를 경험할 때에 우리는 그 분이 내 삶의 목자 되신다는 것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나라, 그 분의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생명의 깊이로 우리를 인도할 부활에 가까이 가 보십시다. 거기에서 생명의 깊이가 보일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이 놀랍도록 풍성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