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1:28-30>
28.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30.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참된 안식>
안식을 찾아 온 세상을 누비고 다녀도 잠깐 동안 육체의 쉼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육체가 쉼을 얻고 강건해져도 모든 육체는 세월의 흐름에 따라 쇠하고 소멸된다는 의미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가기 전까지는 내게 참된 안식이 없었다”는 어거스틴의 고백처럼 결코 소멸되거나 흔들리지 않는 참된 안식은 오직 위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만 주어집니다.
정호승 시인의 “낡은 의자를 위한 저녁기도”라는 시는 인생을 의자로 표현합니다. 인생을 다 살고보니 인생은 거창한 것도, 대단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새 의자라도 세월이 흐르면 낡아지기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인생이 무한히 긴 것도 아닙니다. 인생은 시작되기가 무섭게, 낡은 의자에 한 번 앉았다가 일어나는 것처럼 한 순간에 끝나버립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의자를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자신의 의자를 많은 사람들과 함께 삶을 나눌 보금자리로 가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헛된 욕망과 부질없는 자기 성질, 그리고 까닭없는 분주함으로 자기 의자를 망가뜨려, 자신이 앉지 못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사람도 앉지 못하게 합니다. 그것도 모자라 다른 사람의 의자마저 탐하고 부숴버립니다. 그러다가 인생 황혼을 맞고서야 남은 것이라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고작 낡은 의자 하나뿐임을 깨닫고, 그 아름답고 무한한 가능성을 지녔던 자기 의자와 남의 의자를 망가뜨려 온 자신의 어리석음을 후회합니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자신의 낡은 의자가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잎을 돋우며 환한 복사꽃을 피워 땅의 어둠을 밝힐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별들이 쉬어가고, 쉬어가는 별마다 새가 되는 생명 의자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뒤늦게 탄식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탄식해도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낡은 의자가 새 의자로 환원될 수 없듯이 쇠퇴한 인생 역시 새로워질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그것은 반드시 가능합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반드시 가능합니다. 오늘의 본문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것이 어렵고 힘들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그 짐을 내려놓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가 어떻게든 지고 가야 하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예수님께는 그 짐을 가볍게 만드실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말씀하시는데도 그 분에게 의지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인생 다 그런거지 뭐”. 인생은 다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이해하고 경험하는 인생이 전부가 아닙니다. 결국 낡고 작은 의자 하나를 차지하고, 그것에 앉았다가 일어나는 것이 내 삶의 전부가 아닙니다. 이 의자 하나 차지하기 위해서 버둥거리고, 그것 빼앗으려고 힘써 살다가 가는 것이 우리 인생의 전부가 아닙니다. 그저 그런 것이 아닌, 생명으로 가득한 인생이 우리 주님 안에는 존재합니다. 십자가의 속죄와 부활의 생명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께 나아오십시오. 그 분 안에 있는 참된 안식의 자리로 다가오십시오. 지금도 집을 나간 아들을 기다리며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우리를 기다리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한 걸음 걸어가 보십시오.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삶을 살아감으로 2000년이 넘는 시간을 넘어 우리에게 여전히 생명 의자의 역할을 하는 마태처럼, 우리도 세월이 흘러도 결코 헛되지 않은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한 생명의 아픔을 쓰다듬고, 한 사람의 가슴앓이를 멈추게 하는 생명 의자이신 예수님 안에 있는 참된 안식과 생명을 느끼며 나누며 살아가십시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그 안식으로, 생명의 의자로 초청하십니다. 이 초청에 “예” 로 대답하며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