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4:12-16>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어서, 어떤 양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냅니다.
13. 하나님 앞에는 아무 피조물도 숨겨진 것이 없고, 모든 것이 그의 눈 앞에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앞에 모든 것을 드러내 놓아야 합니다.
14.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늘에 올라가신 위대한 대제사장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 고백을 굳게 지킵시다.
15.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십니다.
16.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자비를 받고 은혜를 입어서, 제때에 주시는 도움을 받도록 합시다.
<말씀 앞에서는 숨길 것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첫 절인 히브리서 4:12은 말씀에 대한 얘기를 할 때 빠지지 않는 본문입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은 칼과 같아서 우리의 속을 꿰뚫어서 우리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를 밝혀냅니다. 그래서 말씀 앞에서는 숨겨진 것이 없기에 우리의 모든 것이 그 앞에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13절)
말씀이 이런 것이라면, 이런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우리가 그 앞에 나아가는 것이 불편할 것 같습니다. 약 2000년 전에 사마리아에서 살던 한 여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요한복음 4장) 예수님이 그녀의 삶에 들어와서 점점 다가오자, 그녀는 이 주제를 피하고 싶었습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종교에 대해서 말하기를 좋아하지만 복음에 딱 부딪힌다고 생각할 때는 그 주제를 피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신앙과 하나님이 지식에 머무를 때는 편하게 여깁니다. 하지만 그것이 삶으로 다가와서 내 삶의 습관을 바꾸어야 하는 상황을 만나게 되면 불편하게 여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에 숨겨진 것들을 드러냅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부분의 변화를 요구하는 그 음성들은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불편하지 않습니다. 16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은혜의 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우리가 자비를 받고 은혜를 입어서, 제때에 주시는 도움을 받도록 합시다.”
여기에서 “담대하게”라고 번역된 말씀을 루터는 “기쁨으로”라고 번역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불편한 것이 아니라 기쁜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그 자리가 “자비”와 “은혜”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자비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뜻합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라고 하면 제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씀은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이고, 그 말씀을 떠올릴 때마다 램브란트가 그린 “탕자의 귀향”이라는 그림이 생각납니다.
남루한 옷을 입고 신발도 한짝 잃어버리고 아버지에게 찾아온 아들이 있습니다. 이 아들은 말년에 고통스럽고 좌절된 삶을 살아가던 램브란트 자신의 모습이었습니다. 또한 이 아들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기에 우리의 연약함을 공감하실 수 있는 분, 죄인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고 십자가에 다다른 의로운 탕자이신 예수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 탕자는 이 땅에서 인정과 칭찬을 위해, 혹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삶을 허비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그림에는 탕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큰 아들은 망나니 같은 동생을 위해 잔치를 벌이는 아버지를 못내 못마땅한 눈으로 내려다봅니다. 아버지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 느꼈거나 늘 동생만 기다리는 아버지가 못마땅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버지와 멀리 떨어진 마음의 거리로 인해서 그는 집에 있었으나 역시 탈선한 존재였습니다.
또한 이 그림에는 아버지의 모습이 있습니다. 아들이 집에 돌아 오기만을 기다리며 무작정 애태우던 아버지. 눈물로 나날을 견뎠기에 결국에는 눈이 멀어버렸지만, 아들이 돌아오자마자 그가 사죄할 틈도 주지 않고 용서해 버리시는 아버지. 고통으로 일그러진 탕자들을 자기의 품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아무 말 없이 껴안아 주시는 우리의 주님 되시고 아버지 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전에 나를 향한 위대한 한 걸음인 십자가로의 발걸음을 디뎌주셨고, 내가 그 분을 멀리 떠나있을 그 때에 돌아올 나를 팔을 벌려 기다려주시는 분이셨습니다.
우리의 모습이 지금 탕자이건 큰 아들이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결국 이 아버지의 모습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내 주님께서 내게 아버지가 되셨듯 나도 누군가에게 영적인 아버지가 되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목자목녀가 되는 꿈을 꾸기를 원합니다. 나로 인해 생명이 태어나는 꿈을 꾸고 주님의 소원에 내 사명을 두고 살아갈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