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이스라엘의 왕인 아합의 요청으로 시작된 길르앗 라못 정복전의 결과입니다.
전쟁의 결과: 패배
아합 왕: 전사
여호사밧 왕: 도망
이러한 결과에 도달하기까지 결국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의 고집으로 일을 하는" 한 사람 아합과
그 사람에 동조해서 함께 거기까지 갔던 또 한 사람 여호사밧이 중심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적으로 볼 때 아합왕은 참 괜찮은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먼저 그는 삶의 지혜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29절)
전쟁의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면 자기가 살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질 것인지를 너무나 분명히 알고 있었고
그 일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왕복을 입고 있으면 적군의 표적이 될 것이 분명했기에 자기는 왕복을 벗고
유다왕 여호사밧에게 왕복을 입혀 그는 표적이 되고 자기는 좀 더 안전해지려는 삶의 지혜가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자기의 일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34절)
전쟁에 패색이 뚜렷함에도 그는 도망하여 자기만 살려고 하지 않고 끝까지 그 자리를 막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전사합니다.
인간적으로 이처럼 괜찮은 삶을 사는 사람들...
그들의 삶의 마지막도 결국은 죽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지했던 여호사밧은 죽음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감동"으로 벗어나는 은혜를 입습니다. (31절)
우리 삶에서 우리를 살리는 힘은 결국 주님께로부터 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주님의 감동! 이것에 의지해서 생명이 살아나는 삶으로 걸어가보는 사람이 되어보려 합니다.
저의 고집을 버리고 주님을 의지하는 삶을 늘 살아가보려 합니다.
또한 오늘의 말씀에서는 "아합"이라는 단어가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냥 "이스라엘 왕"입니다.
이 사실은 제게 시편 1편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의인에 대해서, 행복한 사람에 대해서 구구절절 이야기하던 시편은 악인에 대해서는 그냥 이 한마디로 정리합니다.
하나님이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관심은 의인에게, 주님을 따르는 이들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분이 되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니 저도 주님의 소원을 이루며 살고 싶습니다.
"주님이 내게 관심이 지대하시기에 내 필요를 채우시니까, 나는 주님의 소원을 이루며 살아가는 삶"
이렇게 살아가서 사랑의 관계와 저와 주님 사이에 늘 흐르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이처럼 "그렇지 않음이여"의 삶이 아니라, 주님의 관심을 받는 삶, 주님의 소원을 이루어드리는 삶을 함께 살아가는데 지치지 마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