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0:17-18
17. 주님, 주님께서는 불쌍한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십니다. 그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주시고, 그들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여 주십니다.
18. 고아와 억눌린 사람을 변호하여 주시고, 다시는 이 땅에 억압하는 자가 없게 하십니다.
"무너진 사람과 함께 뛰시는 하나님"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고 계시나요? 혹시 그 분이 두려움의 하나님은 아닌가요? 아니면 우리의 삶을 바라보며 ‘그래 한 번 해봐!’하며 바라보기만 하시는 방관자이자 심판자의 모습은 아닌가요?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의 말씀은 하나님이 결코 이런 분이 아니시라는 것을 너무나 분명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습니다.
1. 주님은 고난 받는 사람을 ‘귀 기울여’ 들으시고 그들을 격려하시는 분이십니다. (경청과 격려) (17절)
요셉과 함께 이집트로 들어갔던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그 곳에서 400년을 살았습니다. 이렇게 세월이 많이 흐르니 요셉이 누구인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유와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이 생겼습니다. 그러자 그들을 종으로 노예로 부리기 시작했지요. 그랬더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고된 일 때문에 탄식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부르짖는 소리란 도움을 요청하는 외마디 비명을 의미합니다. 이런 소리는 들리는게 당연하겠지요. 하지만 탄식한다는 말은 한숨을 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숨을 쉬는 것은 여간해서는 알아채기 힘듭니다. 들린다기 보다 듣기위해 집중해야 보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의 탄식하는 소리를 들으”십니다. (출애굽기 2:23-25)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에게 관심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관심이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주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관심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배신을 했다는 죄책감에 아파하고 힘들어하던 베드로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은 그의 마음을 만지시기 위해 ‘먼저’ 찾아오셨을 뿐 아니라 그가 예수님을 부인한 숫자만큼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게 하시는 세심함을 가지고 찾아오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방관자가 아닙니다. 그 분은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관심이 있으십니다. 그래서 눈여겨 보고 귀 기울여 듣고 있다가 우리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거나 한숨을 푹 쉴 때 우리를 격려하시는 분이십니다.
2. 주님은 고아와 억눌린 자가 더 이상 위협받지 않게 보호하십니다. (보호) (18절)
아무리 경청하고 격려하더라도 그 자체로 끝나면 큰 의미가 없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와 다르십니다. 그 분은 부서지고 무너진 사람을 보호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분입니다. (신명기 32:10-12) 그 분은 우리를 죽음과도 같은 광야에서 찾으시고 황야에서 우리를 만나주시며, 감싸주고 보호하고, 자기의 눈동자처럼 우리를 지켜주시는 분이십니다. 독수리가 날개를 펴서 새끼들을 받아 그 날개 위에 업어 나르듯이 주님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고난 받는 사람을 경청하고 격려하고 보호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제대로 살지 못한다고 여길 때 하나님께로부터 피하려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 분께 걸어가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더 이상 인정받아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분은 이미 우리를 예수님과 같은 가치와 모습으로 인정해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자꾸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지 못할 것 같은 자기의 모습을 보고 두려움으로 피하려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아프고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을 때 그 분은 우리와 함께 달려주시는 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