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90:13-17
13. 주님, 돌아와 주십시오. 언제까지입니까? 주님의 종들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14. 아침에는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채워 주시고, 평생토록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해주십시오.
15.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 수만큼, 우리가 재난을 당한 햇수만큼,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십시오.
16. 주님의 종들에게 주님께서 하신 일을 드러내 주시고, 그 자손에게는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 주십시오.
17. 주 우리 하나님,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셔서, 우리의 손으로 하는 일이 견실하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의 손으로 하는 일이 견실하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는 주님의 종입니다."
모세는 구약성경을 통해서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사람입니다. 신명기서는 그와 같은 예언자가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이야기함으로 (신명기 34:10-12) 모세의 위대함에 대해서 도장을 찍어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모세조차도 그가 지은 오늘의 시편 속에서는 자기는 “주님의 종”이라는 사실을 계속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종’이라는 단어가 익숙하지도 않고 그렇게 불리기도 싫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종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잠언 25:13은 하나님의 종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믿음직한 심부름꾼은 그를 보낸 주인에게는 무더운 추수 때의 시원한 냉수와 같아서,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준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을 쳐들어온 블레셋과의 전투를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은 당시 다윗의 고향이었던 베들레헴에 진을 치고 있었지요. 그 때 다윗은 고향에서 마셨던 우물물이 생각이 났습니다. 지금은 블레셋 군대가 진을 치고 있기 때문에 도무지 갈 수 없는 그 곳. 그래서 다윗은 “누가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을 나에게 길어다 주어 내가 마실 수 있도록 해주겠느냐?” 라고 질문합니다. 소원이 생긴 것이지요. 그 때 다윗의 옆에 있던 세 명의 용사가 있어서 베들레헴으로 들어가 물을 떠서 다윗의 소원을 이루어 줍니다. 성경은 이 세용사에 대해서 이름을 제외하고는 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아마 무명의 장수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삼백명을 쳐 죽이고 삼십인 특별부대의 대장이 된 요압의 아우 아비새보다도, 모압의 가장 뛰어난 장수 둘을 죽이고 사자를 죽이기까지 했던 갑스엘 출신 브나야보다도 더욱 위대한 사람으로 평가받습니다. (사무엘하 23장)
세 용사가 놀라운 평가를 받은 이유는 그들의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도 아니고 많은 업적을 쌓아서 그랬던 것도 아닙니다. 단지 그들의 주군이었던 다윗의 소원을 헤아리고 그 마음을 기쁘게 해주려는 마음을 행동으로 옮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사람이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다른 능력과 재능이 있거나 선한 일을 많이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 삶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헤아리고, 또 그것을 이루어드리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를 헤아리고,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려는 삶을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위대한 일을 이루어 드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나의 삶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주기도문의 삶을 살아가는 것 (마태복음 6:9-10),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신 것과 같은 삶 (마태복음 26:39)을 살아갈 때 우리는 주님의 마음이 시원해지게 만드는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갈 때 주님이 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때 제일 먼저 찾는 사람,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헤아리는 영적인 예민함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세 용사가 다윗의 마음을 감동시킨 것처럼 우리들도 무더운 추수 때에 시원한 냉수와 같이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사람,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