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5:12-14 (현대인의 성경)
12. 여호와를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는 자가 누구냐? 그가 택할 길을 하나님이 가르치시리라.
13. 그는 언제나 번영을 누리며 살고 그의 자손들은 땅을 상속하리라.
14.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는 자들에게 친밀감을 가지시고 그 약속의 비밀을 그들에게 보이실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역설 4 : 두려움 안에서의 기쁨"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 기쁨과 자유를 경험합니다. 그러다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시험이 찾아오게 되면서 처음에 경험했던 기쁨과 승리가 옅어져 갑니다. 그 과정에서 “주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기쁨을 내게 회복시켜 주십시오!”라고 외치는 순간이 생겨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삶은 하나님에 대한 기쁨과 그 분을 향한 두려움이라는 두 감정이 있습니다. 말씀은 이 두 감정을 “두려움 속에서의 기쁨”이라는 역설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런 변화가 일어났을 때 비로소 우리는 기쁨과 두려움 사이에서 감정이 요동치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이 역설은 왜 우리 삶에 필요한 것일까요?
첫째로, 기쁨이 없는 두려움은 삶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그의 인생 중 며칠을 제외하고는 대단히 유쾌한 삶을 사셨습니다. 아이들에게 사랑받는 사람이었고, 잔치자리에는 빠지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아마 예수님은 크게 파안대소하는 모습이 그 분의 가장 대표적인 모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기쁨을 가졌듯이 우리의 삶에도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는 두려움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을 파괴하는지 모릅니다. C.S. Lewis는 ‘천국과 지옥의 이혼’이라는 책에서 천국문에 서 있는 수위를 소개합니다. 이 수위는 오는 사람들에게 한 가지 질문만을 합니다. “당신은 예수를 알게 됨으로써 참을 수 없는 기쁨을 가지고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 어떤 대답을 하는 사람에게든 저는 바울의 한 마디 말로 권면하려 합니다: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다시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둘째로, 두려움이 없는 기쁨은 피상적일 뿐입니다.
오늘 읽은 시편 본문의 말씀은 여호와를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친밀함을 가지시며 약속의 비밀을 보여주신다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과 친밀해지는 통로가 그 분을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시대는 내 편에서 주님과의 친밀함을 이야기하지만 그 분을 두려워하는 마음에는 마음을 쓰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시대의 양극단은 하나님과 전혀 교제함이 없는 육적인 그리스도인들과 스스로 하나님과 친밀하다고 여기지만 실상은 두려움 없이 미혹에 끌려가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출애굽기 15장은 구약성경을 통틀어 가장 멋진 찬양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찬양으로 가기 전 14장의 마지막 절은 우리에게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치신 주님의 크신 권능을 보고 주님을 두려워하고”라고 말합니다. 주님을 두려워함이 찬양의 통로가 되었다는 것이지요.
빌립보서 1:17-18에 나오는 사도바울의 고백이나 사도행전 13:48-52 에 나오는 바울과 바나바의 사건은 앞에서 이야기한 주님에 대한 두려움과는 좀 다른 두려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이 겪은 두려움은 주님을 향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주는 두려움이었습니다. 그 속에서 이들은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기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삶에 두려움이 없는 기쁨은 피상적입니다. 기쁜 일이 있으면 기뻐하고 그런 일이 없으면 기뻐하지 않는 삶. 그렇기에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은 롤러 코스터를 탄 사람들과 같습니다. 하지만 주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사람의 삶은 다릅니다. “주님에 대한 두려움은 다른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쫓습니다.” 우리 삶의 참된 기쁨은 주님에 대한 깊은 두려움에서 시작되고 완성됩니다. 주님으로 인해 삶의 두려움을 내어 쫓을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십시오. 주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으므로 삶의 환경과 상관없는 기쁨의 사람이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