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과거 집사로서 교회를 섬길 때 마리아와 마르다 설교를 무척 싫어했습니다.(그래서 혹시 제 설교를 듣고 싫어하시는 분이 계셔도 크게 섭섭해 하지 않고, 충분히 이해하는 편입니다.) 저는 언제나 마리아 보다는 마르다에 가까운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신학교 다닐 때, 영성신학 수업을 통해 관상기도 훈련을 몇 학기 받았습니다. 한 번은 마리아와 마르다 사건을 가지고 관상기도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기도 속에 제가 마르다가 되었습니다.
반가운 예수님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먼지를 날리면서 갑자기 집으로 들이닥쳤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고, 저는(마르다) 틀림없이 배가 고프실 예수님과 제자들 생각하면서 무슨 음식이라도 차려 대접하려고 바삐 부엌으로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을 대접하는 일은 언제나 즐겁고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예고도 없이 갑자기 닥친 일이라 경황이 없었습니다. 혼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고 있는데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니 점점 피곤하고 짜증이 났습니다. 그 때 예수님 발치에 앉아 있는 마리아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아 그때 그 얄미움. 그리고 바로 그 순간에 예수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씀이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 바로 그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듣는 순간 분노가 확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 따졌습니다. ‘아니 예수님, 정말로 그렇다면, 섬김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마리아더러 일어나서 언니 좀 도와주어라 말씀하셔야 되는 것 아닙니까? ………………’
저는 그 때 제 기도 속의 예수님의 대답을 들으면서, 그 때까지 제가 깨닫지 못했던 많은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예수님께서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얘야, 마르다야... 너도 좋은 편을 택하지 않았니? 너는 앉아 있는 것보다 일할 때 더 즐거운 사람이 아니니? 네가 좋은 편을 택한 것처럼, 마리아도 좋은 편을 택한 것 아니겠니. 네 잘못은 말씀을 듣는 대신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일을 많이 벌려 자신도 괴롭히고 다른 사람까지 괴롭히려 한 점이란다. 내가 밥에 김치라고 한들 기쁘고 고마운 마음으로 먹지 않겠니? 한 가지던 두 가지던 즐겁게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려무나. 나는 네가 행복하기를 바라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행복했으면 좋겠구나.” 이런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이후로 마리아와 마르다의 사건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보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에게 좋은 편이 다른 사람에게는 좋은 편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성장 단계에 따라서 좋은 편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누구나 다 그렇듯이 나 자신도 예외 없이 언제나 나에게 좋은 편을 택해왔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내가 기쁨으로 할 수 있는 것 이상을 하려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체면에 매여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나의 업적 보다 나의 행복에 더 관심이 크신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봉사는 “즐겁게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봉사가 되기를 바랍니다. 나도 나에게 더 좋은 편을 택해서 하고싶은 것을 하고싶은 만큼 하는 자유를 누리고, 다른 사람도 자기가 하고싶은 일을 즐겁게 할 수 있는 자유도 존중해 줄 줄 아는 그런 교회의 문화를 함께 만들어 갈 수 있기를 기도하며 소망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