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로자 룩셈부르크라는 분에 대한 얘기로 편지를 열어보려고 합니다. 이 분은 1871년에 폴란드에서 유대인 집안 자녀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후에는 독일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당시에 이미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 유대인을 백안시하였습니다. 또한 여자들은 아직 투표권도 없던 시기에 이 분은 여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거기다 5살 때 큰 병을 앓아서 두 다리의 길이가 다르게 평생을 살아가셨던 분입니다. 그런 삶의 부족함 속에서 로자는 힘써 평생을 사회주의 운동가로서 온 힘을 다해서 살아갔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독일이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자 독일의 군중들은 그들의 분노와 상실감을 쏟아 부을 대상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과 사회주의자들을 그 대상으로 지목했지요. 그 때, 당시 독일의 사민당은 유대인이면서 사회주의자였던 로자를 군중들에게 분노를 풀 대상으로 던져주었습니다. 그래서 로자는 군중들에게 맞아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막스 갈로라는 사람이 쓴 “루자 룩셈부르크 평전”에는 이 당시의 상황이 눈물겹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분에 관한 이야기를 이처럼 길게 하는 이유는 로자 룩셈부르크가 남긴 한 마디가 제 마음을 깊이 울렸기 때문입니다.
“Those who do not move do not notice their chains.” 한국어로 번역해보면 “움직이지 않는 자는 자기를 옭아맨 사슬을 눈치채지 못한다”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우리는 사람으로 살아가며 별다른 잘못도 하지 않았음에도 머리에서 발끝까지 사슬에 매여서 살아가는 경우가 무척 많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청춘 시절을 취직이라는 이름에 다 바쳐야 합니다. 그런데 취직을 해도 그 자리를 보존하기 위해 평생을 노력해야 합니다. 집을 사지 않았을 때는 집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에게 매여서 살아가야 합니다. 집을 사게 되면 많은 경우에 그 집값을 갚기 위해 은행에 담보 잡혀 수십 년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아플 권리도, 내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권리도 빼앗겨 버립니다. 죽지 않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죠. 이런 삶의 환경에서 가치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삶을 살아가는데, 그들은 별다른 잘못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냥 좀 평범하고 재미있고 보람되게 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던 것이지요. 로자의 말대로 사슬에 묶여있었던 겁니다. 은행 빚이라는 사슬, 취직이라는 사슬, 생계라는 사슬들 말입니다. 그래서 로자는 말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우리는 사슬에 묶여져 있다는 것도 모르고 살아간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움직여야 합니다. 움직여야 내게 어떤 사슬이 매여져 있는지를 알게 되고, 그 사슬을 끊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도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저는 이 이야기가 영적인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나 자신’이라는 우상에 묶여 살아갑니다. 세상의 중심이 내가 되는 것이지요. ‘내 감정’ ‘내 생각’ ‘내 기분’에 묶여서 살아갑니다. 어떤 이들은 ‘과거’라는 상처에 묶여서 살아갑니다. 내 과거가 나의 현재를 주관하고 그 방향이 결코 올바른 길이 아님에도 거기에 몸을 맡긴 채 살아갑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많은 경우에 우리는 내가 얽매여 있다는 것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우리가 움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자리, 삶공부의 자리, 사역의 자리... 우리가 움직일 수 있는 자리입니다. 이 곳에서 우리는 움직여 봄으로 인해 내가 지금 매여 있는 사슬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30도 정도 기울어진 경사면에 세워진 수레를 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아래로 아래로 굴러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좀 힘들고 피곤하더라도 우리에게는 가만히 있을 권리가 없습니다. 좀 힘들지만 끊임없이 움직여야만 합니다. 그 때 우리는 내가 묶여있는 사슬을 깨닫고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그 사슬을 끊을 수 있는 방법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