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예배의 찬양을 이야기하면 피아노와 오르간이 가장 먼저 생각나던 때가 있었습니다. 좀 더 분명하게 말하면 이 악기들 밖에 떠오르는 악기들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1980년대에 교회의 예배 찬양에 처음으로 기타와 드럼 등이 사용되면서 참 많은 논쟁들이 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때로부터 30여년이 지나면서는 예배 때 많은 악기를 사용해서 찬양을 한다는 것이 점점 더 당연하게 여겨졌습니다. 매우 좋은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시편 150편의 말씀을 보면 다윗의 시대에도 우리가 다 알지도 못하는 많은 악기들을 사용해서 찬양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찬양이 지금과 같이 변해온 것은 찬양에 대해서 말씀이 이야기하는 방향과 일치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더 다양하고 신선한 도구들이 사용되어서 찬양하는 시대가 오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처럼 많은 악기들이 예배 때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찬양 사역자’라는 전문직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의 교회와 예배를 생각해 보시면 예배를 인도하고 찬양을 인도하는 것은 그냥 성도 중 한 사람이나 목사님 자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찬양에 악기들이 더 들어오고 세팅도 복잡해지면서 찬양의 인도를 모든 사람들이 하기가 어려운 상황이 되어갔습니다. 예전의 예배에서는 존재하지 않던 ‘콘티’ 라는 것을 짜야 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찬양의 노래에 맞춰 악기와 목소리를 맞춰야 하는 것이 일상화되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히 한국교회에서 1980년대부터 붐이 일기 시작했던 “경배와 찬양”이나 “예수전도단 화요모임” 등의 대형 찬양예배는 이제는 그 규모는 줄었지만 더욱 다양한 모습으로 성도들의 필요를 채우고 있습니다.
그러다 ‘찬양 사역자’라는 이름이 점차 ‘예배 사역자’라는 이름으로 바뀌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찬양이 예배의 일부이기에 어쩌면 당연한 변화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용어의 변화를 통해서 일부에서는 “찬양=예배”라는 조금 빗나간 생각이 심겨지기 시작했습니다.
예배는 내가 살아왔던 한 주간의 삶의 경험들을 가지고 나아와서 하나님과 만나서 대화하는 시간입니다. 주님과 대화할 때 하나님께 내 말을 전하는 통로가 주로 기도입니다. 그래서 예배 10분 전에 오셔서 주님께 기도하면서 예배를 여시면 좋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 때에 우리는 지난 한 주간의 삶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가지고 하나님께 아룁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대화하는 정말 좋은 통로 중 또 하나가 찬양입니다. 찬양은 ‘곡조 있는 기도’라고 하지요. 그러므로 기도에 높낮이나 리듬이 중요하지 않듯, 찬양에 있어서도 리듬과 곡이 중심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가사 하나하나가 더 중요합니다. 찬양을 할 때, 내가 그 곡을 알면 더 좋습니다. 눈을 감고도 부를 수 있게 될 때, 가장 최고의 유익을 얻습니다. 하지만 그 찬양의 곡을 모른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가사의 내용은 알 수 있습니다. 그 가사의 고백과 약속이 내가 살아왔던 한 주간의 삶의 경험 속에 심기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가사의 내용이 있는 찬양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이야기를 들려 드리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으로 말씀하시나요? 설교말씀으로 이야기해 주십니다.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네가 지난 주에 그렇게 살았구나... 수고했다. 애썼다. 이번 주는 이렇게 살아보지 않으련?” 말씀해 주시는 겁니다. 그렇게 우리가 한 주를 살아갈 수 있는 결단을 주십니다. 그리고 힘을 주십니다. 이렇게 찬양은 하나님께 우리의 이야기를 하는 시간,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도구로 작용합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