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찬양을 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사실 그 때는 찬양 뿐 아니라 노래하는 것을 즐겼다고 하는 것이 더 맞겠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교회에서 친구들과 중창단을 만들어서 주변 교회들을 방문하며 행사를 뛰곤 했었지요. 그렇게 찬양에, 노래에 익숙해지던 제가 처음 기타라는 악기를 접하게 된 것이 재수하던 시기였습니다. 대성학원에 다니던 저는 주변에 하숙집에서 8명의 다른 하숙생들과 함께 살게 되었고, 그 중 “광야에서”를 기가 막히게 부르던 한 형에게서 기타를 처음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대학을 들어가서 CCC 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찬양순’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찬양순’에 가입할 수 있는 조건이 찬미예수 찬양집에 있는 모든 찬양을 부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어서, 한달 동안 기숙사에서 시간이 날 때마다 어설프게 기타를 치면서 찬양을 외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다 잠시 ‘기독 노래운동 뜨인돌’ 활동을 하면서, 당시에 대학 도서관 앞에서 매주 수요일 50~80명의 학생들이 모여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찬양하던 ‘아크로 찬양모임’의 공동 인도자로 서게 되었습니다. 학교에 세워져 있던 몇 개의 교회와 기독동아리의 찬양 리더들이 매 주 돌아가며 찬양을 인도하곤 했었는데, 저는 기타를 칠 수 있다는 이유로 2학년이 되면서부터 CCC의 찬양 인도자로 서게 되었습니다. 30분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잠시나마 캠퍼스에 하나님의 이름이 선포되는 그 순간이 제게는 참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대학교 3학년 때는 캠퍼스의 문화관에서 2,500여명의 기독청년학생들의 앞에서 네 명의 동료 찬양리더들과 함께 “복음, 민족, 역사”의 문을 열기도 했습니다. 그 때 제가 선택한 곡이 ‘함께 부를 노래가’라는 찬양과 ‘내가 태어난 땅’이라는 찬양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캠퍼스와 민족에 만연한 불의의 장막을 벗어 던지고 하나님이 부어주실 의로움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찬양했었습니다.
군대에서도 어설픈 피아노 반주로 신병교육대에서 예배의 찬양을 섬겼고, 본대에 배치되어서는 성가대와 찬양팀의 리더로 섬겼습니다. 제 아내를 만났던 무학교회에서는 “예닮”이라는 찬양팀을 맡아서 약 1년 정도 섬길 수 있는 기회가 있었고, 그 후의 사역지였던 마포교회에서는 그 때까지 없었던 청년부 예배를 만들면서 찬양팀과 성가대를 만들어 조직하기도 했었습니다. 청년 성가대 지휘자가 바뀌던 기간에는 제가 지휘를 하기도 하면서요. 이 때, 여전히 부족하지만 성가대 지휘법이 많이 늘었던 것 같습니다.
2005년부터 5년 3개월을 섬겼던 금문교회에서 찬양팀을 인도하는 리더로 2년 정도를 섬기기도 했습니다. 한국의 찬양 사역팀인 ‘어노인팅’에서 싱어이자 리더로 섬기던 자매가 와서 그 자리를 기쁘게 물려주었구요. 그리고 우리교회로 와서는 예배 목사로 섬기기 시작했던 2014년부터 지금까지 때로는 성가대 지휘를, 그리고 지속적으로는 주빛찬양팀의 리더를 맡고 있습니다.
찬양과 함께 걸었던 제 시간을 이렇게 돌아보니 참 오랜 시간이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참 많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순간 하나님께서 저를 키워나가셨다는 확신이 들기도 하구요. 이처럼 찬양은 저의 신앙생활과 떨어질 수 없는 주제입니다. 하나님을 높일 수 있는 가장 최고의 방법이기도 하구요. 그리고 찬양은 우리가 주님을 예배하는 것과 떨어질 수가 없는 도구입니다. 찬양이 예배와 떨어질 수 없다? 무슨 말일까요? 그 부분에 대해서 다음 주에 한 번 더 나누겠습니다.